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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술시(戌時) 무렵….
여느 때처럼 소어는 죽엽청 두어 병을 챙겨, 백인화의 숙소를 찾았다.
소어야 원래 그렇다지만, 백인화와 전우치는 도사인데도 불구하고 술을 좋아하는지, 반색하며 소어를 맞이했다.
“허허! 소어야. 이제 너는 백도의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었구나.” 한 순배의 술잔이 돌았을 때.
백인화가 허허로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에이! 백도의 영웅은요, 무슨.”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예전부터 말하지 않았더냐. 너는 세상을 구할 영웅의 상(相)을 타고난 자라고.” 그랬다.
백인화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소어가 영웅의 상을 타고난 자라 말해왔다.
그땐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뿐이었는데.

‘음… 영웅의 상이라… 정말 그런 게 있을까?’ 최근엔 문득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소어가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근래에만 해도 소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을 수없이 겪었다. 파워볼게임
그런 경험을 쌓아가며, 세상에 운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영웅의 숙명을 타고났을 수도 있단 직감이 은연중 솟구친 것이다.
“만약 어르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정말 세상을 구할 영웅으로 태어난 거라면. 음… 글쎄요.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닌 것 같네요.” “허허. 어찌 그리 생각하는 게냐?” “솔직히 저는 그래요. 무림에서 활동하는 이유가 오직, 본 세가의 군림천하를 위해서거든요. 세상의 구하고 만천하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싶은 생각?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저랑 우리 세가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사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현재, 백도에서 소어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때문에, 진소어란 인간 자체의 기대심이, 극에 달한 상태였는데 누군가 이런 소어의 담백한 심정을 듣게 된다면 적잖이 실망할 터였다.
하나 백인화나 전우치는 소어에게 막역한 존재이자,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허물 없는 사람들이라, 소어는 솔직한 심정을 허심탄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소어야…. 네 마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너는 너의 꿈을 위해 인생을 엔트리파워볼 살아갈 권리가 있다. 하나 네 뜻을 이루기 위해선, 우선 강호의 태평성대가 담보되어야 한다. 이래나, 저래나 모용세가는 강호에 소속된 무가(武家)가 아니냐? 백련교의 손에 백도가 요절난다면, 어찌 모용가가 무사할 수 있겠느냐?” “후… 그것도 그렇죠.” “또한. 고금 이래, 모든 영웅의 삶은 초년기에 고단함을 비껴가지 못했다. 너 역시 과도기에 접어들었을 뿐인 게야. 비 온 뒤, 땅이 더욱 단단해지는 것처럼, 백련교란 암흑의 장막이 걷히는 날. 네 운명에도 화사한 봄날의 햇볕이 드리우게 될 게다.” 백인화의 음성에서 짙은 온화함이 묻어나왔다.
더불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현현함과 힘이 서려 있었기에 소어의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
“하하. 어르신. 마치, 사주를 풀이해주시는 것 같아요. 근데, 묘하게 듣기 좋네요. 정말 그리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 될 게다. 내 말을 믿으려무나. 너는 비록 천애고아로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지만, 하늘이 굽어살피는 아이니, 훗날 반드시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게다.” “자! 그럼 그날이 오길 꿈꾸며.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허허. 오냐.” “우치 형도 받으세요. 하하하.” “그래. 하하하.” 소어가 백인화와 전우치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건배!”
그렇게 세 사람은 호쾌하게 각자의 술잔을 들이켰는데….

“아! 우치 형. 내일 세가에 들를 생각인데 같이 안 갈래요?” “세가에? 한창 바쁜 와중에?” “중원 각지로 흩어진 분타주와 맹원들을 소집하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릴 거 아니겠어요? 그 사이 세가로 복귀해서 여러 가지 일도 정리하고, 본가도 한판 붙을 준비를 해야죠.” “음… 그러네. 한데, 나는 왜? 같이 가야 할 이유라도 있어?” “에이! 알면서.” “???”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요?” “설마… 너?” “흐흐.”
“어쩐지 어투가 좀 공손하다 했네. 너 인마, 내 양탄자 타고 편하게 갈 요량인 거지?” “그치만 편한 걸 어떡합니까!” “아서라! 나도 수련해야지. 당장, 마수들을 때려잡으려면 내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데. 바쁘다, 바빠. 한가하게 요령까지 언제 다녀와?” ‘철벽치는 거 보소…’ 전우치의 말대로였다.
최근 비행술에 흥미가 돋아난(사실 흥미보다, 그냥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이 클지도) 소어는 세가로 돌아가는 길에, 전우치를 대동해 양탄자를 얻어탈 생각이었다.
하나 전우치의 반응을 보니, 그러한 희망사항은 요원해 보였다.
“에이! 치사해. 알겠어요. 나 혼자 갔다 올게요. 대신 수련이나 제대로 하고 있으세요.” “걱정하지 마라. 마수 녀석들. 의천필로 싹 다 조져놓을 테니까.” “기대 하겠습니다, 대(大) 도사님.” “하하핫.”
“크크큭.”
은은한 달빛 아래, 취해가는 세 사람의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


“야! 한백!” “야? 한백? 이게… 이게, 어디서? 확, 마! 인마. EOS파워볼 난 분타주님이시고, 너는 부 분타주인데. 호칭이 그게 뭐냐, 호칭이. 다시 불러보거라.” “뒤지고 싶냐?” “야! 그래도 분타 안에선 조심하라니까.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한 번 기강이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다고, 새끼야!” 무림맹 낙양 분타적지 않은 규모와 맹원들이 소속된 분타로서, 요충지라 할 수 있는 곳.
공교롭게도 전(前) 인단 생도. 즉, ‘지옥 교관’ 소어 밑에서 개처럼 굴러, 이제는 일류 고수로 거듭난 한백과 장병일은 각 분타주, 부 분타주로 임명되어 낙양 분타의 지휘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지금 여기 너랑 나밖에 없잖아.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나한테도 상관 노릇 하는 거야?” “뭐?!”
“한백아. 생도 시절엔 내가 단장이었다. 그때, 너 진형 몰래, 농땡이 치던 거 봐준 게 몇 번인지 아냐? 지금이라도 진형한테 이실직고해?” “여기서 진형이 왜 나와?” “아 됐고. 이거나 봐라.” “이게 뭔데?” 장병일이 입씨름을 멈추고, 한백을 향해 한 장의 서찰을 내밀었다.
한백이 그를 상세히 훑어갔다.
“뭐야? 이제 제대로 한판 붙는 거야?” “그렇지! 게다가 선봉군의 지휘관으로 진형이 임명됐다잖아!” “캬! 우리 진형은 이제 그냥 숫제 영웅이네, 영웅. 존재감으로만 따지면 솔직히 구대문파의 장문인급 이상 아니냐?” “그렇지. 진형이 지휘관에 고려에서 오신 백 방주께서 고문이라면, 제갈 군사님이 이번 전투에 한정해선, 진형의 오른팔이 되는 셈이잖아.” “미쳤다, 미쳤어. 사람이 이렇게 출셋길을 고속으로 달려도 되냐?” “그럴 만하지. 그 인간 무공이라면.” “무공뿐이겠어. 잔머리는 또 얼마나 좋다고.” “어쨌든 이번 기회에?” “그 쓰레기 같은 사이비 교도 놈들 대가리 있는 힘껏 깨줄 수 있겠지?” “하하하하하핫!” “크크크크크큭!” 한백과 백인화는 분타주 실이 떠나가라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이러한 날을 얼마나 학수고대했던가?
물이 고이면 썩듯, 그간 무림의 후기지수들은 유례없는 강호의 EOS파워볼 태평성대에 점차 고여가고 있었다.

무림인의 근본은 싸움에 있다.
이것은 시대 고하를 막론한 진리요, 변하지 않는 가치.
피 튀기는 도검삼림에서 하루하루 살아야 할 강호인들은, 지금껏 웅크려왔고 고여왔고, 그렇게 썩어왔다.
하나.
드디어 침잠해 있던 무림인의 본능과 자아를 마음껏 실현할 기회가 목전에 당도하였다.
거악(巨惡)과의 결전을 앞두고, 젊은 무림인들은 두려움에 떨기보다, 외려 강한 호승심과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 의지를 발산코자 했다.
“당장 짐 싸! 가자, 본청으로!” “백련교 새끼들, 딱 대!” 그렇게 한백과 장병일.
아직 간부라 부르기엔 너무나도 철딱서니 없는 두 꼴통(?) 전, 인단 생도들은 다시금 무림맹 본청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열흘 뒤, 모용세가정오 무렵.
여느 때처럼 모용세가의 연무장엔 끔찍한 비명(?)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끙…”
“으으…” “아아아악!” 비명은 바로, 수련에 몰두 중인 인영들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는데….
‘가주님께서도 진 공자를 닮아가시는구나… 저토록 살벌하게 수련을 시키다니!’ 먼발치에서, 그 끔찍한 수련을 지켜보던 대총관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언제부터인가 이 집구석엔 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은, 점잖기 그지없던, 숫제 선비 같던 사람들이 특정인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특정인은 소어였고, 애석하게도 소어의 성정은 ‘점잔’이나 ‘선비’ 같은 단어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말인즉슨.
‘이제 모용세가의 모든 사람이 악동이 되어버렸어.’ 모용가 전원이 ‘소어화’ 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다들 힘내자! 가주님께서 직접 우리를 수련시켜주시고 있잖아…. 게다가 사부님이 출타하시기 전에, 했던 말을 잊었어? 죽을 만큼. 아니!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몇 년만 수련하면, 당당한 무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죽는소리, 앓는 소리는 그만두고 수련만 하자!” 낑낑거리는 소년, 소녀들을 다독이며 수련에 매진 중인 청년.
소어의 수제자, 이백의 의기 충만함은 나날이 치솟아, 이젠 가주를 비롯한 세가의 원로들조차 고갤 설레설레 흔들 정도였다.

‘이백 공자는 정말 미친 사람 같구나.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다니. 저건 그냥, 의지가 강하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거늘…. 괴물들이야. 어째 들어오는 외부제자들 족족 다 괴물인 건가? 허!’ 그랬다.
대체 모용세가에 무슨 천복이 내려온 것인지, 소어와 이백에 이르기까지 두 외부제자는 집안을 새롭게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그때.
“계시오?”
정문 너머에서 낯선 음성이 뻗어 나왔다.
일순, 가주 모용백을 비롯한 세가 모든 인물의 눈에 의아함, 그리고 모종의 불안감이 떠올랐다.
‘상당한 내력을 실은 음성이다!’ 모용백은 짐짓 사람들에게 손짓한 뒤, 직접 발을 내디뎌 정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
그의 눈앞에 수십여 명에 달하는 흑의인이 들어왔다.


모용백은 비록 오대세가의 가주 중에서 가장 무공이 약한 축에 속했지만, 학문적 성취가 드높고, 통찰력이 뛰어났다.
해서, 대번에 흑의인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흑색 장포 안으로 금빛 흉갑을 두른 자들…. 게다가 일신의 기도가 한 자루의 명검과도 같은 자들이다. 이런 집단은 천하에 단 한 곳뿐일 터.’ 모용백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귀하들은 혹, 금의위의 인물들이오?” 그러자, 그들 중 책임자로 보이는 사내.
바로, 진원탁이 모용백에게 한 걸음 다가서 냉랭하게 말했다.
“확실히 오대세가의 가주라 식견이 넓군. 그렇소. 우리는 금의위이며, 나는 금의위장, 진원탁이라 하오.” 그 순간.
진원탁을 바라보는 모용백의 눈이 심유하게 빛났다.
‘확실히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낯설지가 않아… 어딘지 익숙한 기도를 가진 자 같은데.’ 게다가.
모용백이 본 진원탁의 얼굴은 묘하게 소어를 닮아 있었다.

하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체 황제의 직속대인 금의위가 왜 모용세가를 찾아온 것일까?
혹시 동창의 문제일까?
하나, 동창은 금의위와 정치적 알력 다툼이 상당한 견원지간이 아닌가.
머릿속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와중이지만, 모용백은 그런 단상을 지우며 공손하면서도 당당한 어투로 재차 물었다.
“금의위는 황실 기관이 아니오? 혹, 모용세가에 볼일이라도 있소?” “그렇소. 우리는 몇 가지 사안을 조사하기 위해 이곳에 당도한 거요.” “……알아듣게 말씀해주시구려.” “금일 이 시간부로, 본 금의위는 모용세가를 압수 수색하고 가주를 비롯한 대제자 진소어. 더불어 세가의 모든 원로를 압송하여 취조하겠소. 모든 것은 국법의 토대 아래, 이루어질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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